고속도로를 정상 속도로 열심히 달리는데 앞에 장애물이 가로막았다. 차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피는 데 열중한 나머지 차 안에 아기가 자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꼴이었다. 지난 주 몸과 마음이 부산했던 터라 결말 단계만 남은 이 책을 아예 생각조차 못했다. 반납 알리미를 보고 부랴부랴 마저 읽었다.
196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의 배경은 빅토리아 시대이다. 발단 부분의 첫 문장을 읽을 때 조금 고답적인 19세기 소설이려니 했었다. 그런데 고전 소설과 달리 이 작품에는 작가가 끼어들어 이야기를 한다. 전지적 시점에서 작가의 1인칭 시점으로 변주가 일어났다. 예를 들면 찰스가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사라를 찾아 가는 부분에서 다른 승객들은 찰스의 잔뜩 구겨진 인상에 지레 겁을 먹고 다른 칸으로 옮겨가는 데, 찰스의 인상 따위 관심 없다는 듯 구레나룻 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탄다. 그가 바로 작가였다. 찰스의 맞은편에서 주인공을 관찰하고 묘사한다. 게다가 이 소설은 허구임에도 역사적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단순히 시대적 배경으로 당대의 영국 수상을 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인공 사라가 기거하는 집이 유명 화가의 자택이고, 화가가 여동생과 함께 실제로 등장해서 찰스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라는 청소년 소설에 고전주의 화가 벨라스케스가 등장한다. 그의 그림 <시녀들>에서 이야기 모티프를 얻은 작가는 그림 속의 모든 인물을 소설에 출연시킨다. 이런 형식을 메타 픽션 이라고 한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포스트모던한 소설이다. 기존의 소설 담론을 깨트리며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한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이 소설은 욕망 부분에 인용되었다. 소설 속에서 사라 는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적인 도덕에 의하면 굉장히 부도덕한 여자다. 미혼의 중류층 아가씨가 프랑스 중위를 뒤따라가서 혼전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마을에서 미친 여자 취급을 당한다. 그녀는 당대의 요조숙녀 기준에서 한참 먼 불길한 여자였다. 그렇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미끼를 던져놓고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 후, 찰스와 함께 반전에 깜짝 놀라게 했다. 더구나 그녀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 답지 않게 무척 실존주의적 삶을 살아간다. 자신을 부당하게 바라보는 현실, 여성의 삶을 옥죄는 도덕 기준에 저항 한다.
작가는 찰스를 상징하는 당대의 지적 분위기를 비판하는 듯하다. 몰락하는 귀족과 돈을 앞세워 성장하는 부르주아. 귀족 찰스는 품위만 있고, 약혼녀 가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하다. 약혼녀 가정은 돈은 많지만, 품위가 떨어진다. 지적이고 이성적인 찰스도 결국 욕망 앞에서 뿌리째 흔들리고, 위선을 벗는다.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사라가 “자신을 잘 모르겠다.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어떤 켜를 이루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의미의 말을 찰스에게 뱉을 때 현대적 의미의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찰스는 고고학을 좋아한다. 특히, 화석처럼 오랜 세월의 지층을 알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사라가 찰스에게 했던 말처럼 찰스 자신은 이성을 사랑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시간이 퇴적된 지층처럼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가늠할 수 없는 화석덩어리가 아닐까.
찰스에게 사라는 수수께끼를 품은 스핑크스다. 남성에게 여성은 스핑크스와 같은 존재다. 얼마 전에 신화를 통해 본 여성과 남성의 상징을 떠오르게 한다. 그에게 사라는 스핑크스처럼 의문이며 고르곤 자매처럼 공포의 대상이다. 그녀가 내품는 페르몬에 취해 오랜 모험으로 귀가가 늦은 오디세우스처럼 그녀를 찾아 유럽 전역과 미국까지 여행하는 유목적 삶을 살았다. 그가 진정으로 유목민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미국 문화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지극히 영국인다웠으니 어쩌면 무늬만 유목민이었을 것이다.
현대의 출발은 빅토리아 시대이다. 자본주의 경제제도는 물론 정치, 문화, 과학, 법률, 가족제도가 만들어지고 귀족, 부르주아, 하인처럼 신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당대의 변화와 욕망이 소설 속 인물의 삶에 묘사되었다. 현대와의 연속성 속에 살핀다면, 여전히 이성의 가면을 쓴 욕망의 민낯과 알 수 없는 욕망의 지층과 분투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한 지는 꽤 오래 전이다. 소설가 김영하 씨가 아내분과 결혼 전 처가에 인사를 갔을 때, 장모님이 소설을 쓴다니깐 이 소설을 읽어봤냐고 물었단다. 이 소설이 아내분과 결혼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믿거나말거나 한 에피소드를 읽고, 꼭 한 번 읽어야겠다고 제목을 메모해 두었었다. 읽기를 잘 했다.
빅토리아 시대 소설과 포스트모더너 소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지평의 소설
대담한 주제와 독창적인 서술방식으로 주목을 받은 존 파울즈의 대표작으로, 매혹적인 미스터리와 에로틱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19세기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수용하면서(또한 슬며시 조롱하면서), 옷깃의 주름에서부터 어투의 어색함에 이르기까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세심하고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대의 위선과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두 총명한 남녀의 사랑이야기인 동시에, 자유에 대한 정열이 고갈되어 버린 20세기 상황에 대한 탁월한 우화이다.
1867년 봄, 영국 남서부 해안의 작은 마을 라임. 그 황량한 바닷가에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난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방파제 끝에 서 있는 또 한 여인. 숨막힐 듯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왠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난다. 이 사건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도, 오늘의 작은 의혹이 과거의 커다란 참사를 불러내고, 이곳이 조용한 몸짓이 저곳의 소란한 움직임과 얽힌다. 마을은 평온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잠들지 못하는 염탐과 호기심의 눈초리들이 곳곳에서 번득이고 있다. 작가는 그 눈길들의 행적을 쫓으며, 때로는 과학자처럼 추적하고, 때로는 사회학자처럼 분석하는데…….
프랑스 중위의 여자 하
프랑스 중위 놈과 놀아난 년의 로맨스
존 파울즈 연보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