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시집에서 좋은 시를 보는 건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20년 만에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 동창을 만난 것처럼. 시는 난해하고, 시대상을 알아야 이해가는 것도 있지만 시 그 자체로 웃음이 나거나 눈물이 나는 시를 만나면 나는 굉장히 행복하다. 윤희상의 시집에서 그런 시를 하나 만났다. 읽는 순간 빙그레 웃음이 났고, 그 상황이 머릿속에서 그려져 안타깝지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희망
여자 아이는 앞으로나란히를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앞으로나란히를 해보지 못했다.
많은 아이 가운데, 가장 키가 작았다.
언제나 맨 앞에 섰다.
졸업식 날 펑펑 울었다. (55)
나도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학교 다닐 때 1번은 했던 적이 없었다. 그만그만한 친구들 틈에서 1번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기는 했지만. ^^ 상상해 본다. 한 번도 앞으로나란히를 할 수 없는 아이. 늘, 당연히 맨 앞에 서야 했던 아이. 체육시간이든 조회시간이든 운동장에 나와 줄을 서면 ‘기준’은 할 수 있어도 ‘앞으로나란히’는 할 수 없는 아이. 졸업식 날 그래서 울었을 것이다. 그것이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어서. 어쩜 앞으로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짧은 시지만 여자 아이의 마음을 너무도 잘 나타낸 것 같다. 나처럼 작은 사람에게는 특히나 더 그 느낌을 알 수 있으니까. 시란 참 묘하다. 고작 5줄로 그 상황을, 그 때를 바로 상상할 수 있게 하니까. 지금도 체육시간이나 조회시간에 키대로 서는지 모른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상황에서 늘 앞에 서야했을 여자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이 시가 마음에 들었다.
이 시 말고도 내 마음을 짠하게 하는 시도 많다. 이미 알고 있지만 생각하거나 상상하지 않았던 일상들. 그 안에서 시를 쓰고 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인의 능력이 부럽다. 시집을 읽지만 이 안의 시들을 모두 기억할 수 없다. 읽고 나면 모두 잊어버리는 게 내 특기이자 단점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시를 읽는다. 이런 시들이 있고 이런 삶이 있구나.. 내가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모든 인생을 이해할 수 없듯 시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구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훗날 ‘윤희상’이라는 시인의 시집을 다시 만나면 반가울 것 같다. 이번에는 어떤 시로 독자의 마음을 흔들 것인가? 하는 상상으로.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시를 읽는다. 맨살에 닿는 느낌 그대로 그 자체를 읽고 생각한다. 애써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나는.. 시를 읽는다.
무릇 살아 있는 것들에게는 각자의 말법이 있다. 새에겐 바람을 읽어내는 새들의 말이, 물고기에겐 물속에 스며드는 물고기만의 말이 있다. 생명은 이렇게 자신만의 방식을 별다른 배움 없이 자득하여 삶을 영위해나간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또한 혼돈이기도하다. 그 말법들은 언제든 스스로를 깨뜨릴 위험을 안고 있으며, 그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세계는 한없이 미망迷妄할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들은 늘 어둠 속을 헤매며, 그럼에도 활기에 찬 생을 조심조심 이어나간다.
이 명백한 격률準則을 다양한 생태 속에서 발견해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널리 읽힐 수 있는 말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더 쉽지 않은 일이다. 윤희상은 어쩌면 이런 사물 고유의 말법을 읽어내는 데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진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해하기 쉽다.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늘 새로운 심상이 탄생하고 아름답게 읽힌다.
시인의 말
1부
어떤 물음 / 아이폰 / 말의 감옥 / 도너츠 / 장닭 / 도둑고양이를 위한 변명
손톱 / 돌, 혹은 두꺼비 / 상여 / 상수리나무의 기억 / 고슴도치
오래 남는 말 / 갈 수 없는 나라 / 시장경제 / 꿈의 번역
사과와 사과 씨 / 국제정치학회 여름 세미나 / 핵무기는 없다
일본 여자가 사는 집 / 노래하는 사람
2부
바위 / 포크와 젓가락 / 안테나 / 김승재 / 무연고 묘지 / 서울 지하철 2호선
북악 스카이웨이 / 닮다 / 가면무도회, 또는 너무 많은 나
강경애라는 소설가 / 보타사 / 거리의 싸움 / 노숙의 집 / 희망
빛 / 무등산의 마음 / 도시는 기억하지 않는다
김대중주의자 / 영산포 장날 / 버드나무로부터의 편지
3부
꽃 / 인화하지 못한 사진 / 연학이 형 생각 / 남대문 상회
나무상자 / 탑돌이별 / 안암동에서 / 오규원 시인 어록
컵을 바라보는 다섯 가지 방법 /봄에 만난 아이 / 비밀 / 아, 김근태 / 영웅
겨울 도서관 / 역사는 흐른다 / 가을 이후 / 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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