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저자의 20대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다. 바람 하나 불지 않는 평화롭고 전형적인 미국 동네인 보스턴 외곽 지역, 그 따분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지쳐있던 저자는 무작정 미국 대륙 횡단을 하겠다며 히치하이킹을 떠난다. 여행 도중 그는 어느 마을 어귀에서 행색이 남루한 수상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남자는 그에게 다가와 어디로 가는 중인지, 먹을 것은 얼마나 가졌는지를 물어보았고, 저자는 캘리포니아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하면서 혹시나 식량을 빼앗길까봐 그냥 치즈만 조금 있다고 둘러댄다. 그러자 남자는 치즈 조금 가지고는 캘리포니아까지 갈 수 없을 거라 말하며 자신이 갖고 있던 도시락을 저자에게 건네주었다. 원래 탄광에서 일거리를 구하며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였던 그는, 마침 그날은 탄광에서 대체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날이어서 도시락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남자의 친절에 충격 아닌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후 그 남자의 친절함은 저자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맴돌게 된다. 생전 처음 보는 젊은이에게 혹시나 도와줄 것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마음을 써 주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인상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남았고, 왜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정서가 희귀하고 소중한 것이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정서가 결핍되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저자는 자신이 그 남자에게서 느꼈던 인간성의 기원을 인디언 원주민 사회에서 발견한다. 미국의 역사에서 건국 초기의 정착 시기에, 인디언 원주민 사회로 이탈하는 미국인이 꽤 많았다고 한다. 인디언 원주민 사회의 생활 방식에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이처럼 문명사회에서 인디언 사회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인디언 사회에서 문명사회로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벤저민 프랭클린과 같은 당대의 계몽적 지식인들을 침통하게 하고도 남았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합리성이 만들어낸 도시와 정부가 인디언 사회보다 못하다는 암시로 충분했고, 분명 지식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문명 시민들은 무엇이 아쉬워서 위생적이고 안전한 도시를 떠나 위험하고 예측하기 힘든 야생으로 떠났던 것일까. 저자는 도시사회가 주지 못하는 인간의 갈망을 인디언 사회가 충족시켜주었다고 보았다. 인디언의 삶은 다채롭고 흥미로웠으며, 사회관계는 권위적이지 않았고 자율적이며 평등했다. 또한 인디언 사회는 규모가 작고 밀접하게 상호작용했기 때문에 공동체에 대한 각자의 기여가 즉각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반면 도시 생활은 뻔하고 틀에 박혔으며, 복잡하고 멍청해 보이는 절차와 권위가 가득했고, 복잡거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기여를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심리학의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만족하며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자신이 맡은 일에 유능함을 느낄 것. 둘째, 자신의 삶에 진정성을 느낄 것. 셋째, 타인과 유대감을 느낄 것. 도시인들은 과연 유능함과 진정성과 유대감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갈까. 일주일을 잡고 세어보아도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모든 구성원이 함께 수렵채집하는 것이 일상인 인디언의 삶은 일의 시작과 끝이 분명했고, 자신의 성과가 눈에 드러났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등하게 나누었으므로 공동체에 대한 기여감과 유대감이 강했다. 사실 인디언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기 때문에 다 먹지 못하는 것은 나누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도 하다. 또한 인디언의 사회관계는 대체로 평등할 수밖에 없다. 그야 한 개인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다른 사람 몇 명이 뭉치면 쉽게 제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의도에 반하여 무언가를 강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러한 인디언의 생활상은 고대 인류의 심성과 생활 방식을 대체로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인간 공동체는 살아남기 위해서 긴밀하게 상호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 지어 사냥했던 인류에게 있어서 무리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인간을 비롯해 사회성을 지닌 영장류가 외따로 남아 살아남은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냥활동이나 천재지변과 같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는 항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의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가 서로를 긴밀히 배려하고 협력하도록 이끌었다. 너의 위험은 곧 나의 위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유대감과 이타심을 본성으로 체득하게 된다. 고대 인류 공동체가 항상 사이좋았던 것은 아니다. 공공의 수확물을 나누는 데에는 항상 무임승차자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노력에 늘 기생하기만 하거나 수확물 대부분을 독점하려는 행태는 극단적으로는 그 공동체의 존속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류는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감시하고 처벌했으며, 이러한 감정은 현재 공정심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인류학자 크리스토퍼 보엠의 말을 인용하며 인류의 양심이 덩치 큰 먹잇감을 사냥해 온 결과로써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집단 수준의 상호협력을 유지하고 발달시키는 데에는 그런 정서적 기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인류는 사피엔스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 백만 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함께 부대끼며 살아왔다. 반면 지금처럼 제대로 된 옷가지를 걸쳐 입고 문명인 노릇을 시작한 지는 1만 년이 채 되지 않았다. 10년 동안 몸에 익힌 습관을 단 한 달 만에 바꾸려 하는 셈이다. 당연히 잘 될 리가 없다. 하지만 게임의 규칙은 바뀌었다. 한 번 시작된 농업 혁명은 멈추지 않고 문명으로 이어지면서 공동체의 규모는 점차 팽창했다.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각자 재산을 모아둘 수 있었다. 곡식이 고기보다 좋은 점은 썩지 않고 훨씬 오래 간다는 것이다. 이제 함께 사냥하지 않더라도 평소 모아둔 식량으로 충분히 혼자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단지 개인이 열심히 노력해야 성공하는 곳이라는 신화는 이때부터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이러한 경향은 현대인인 우리가 더 잘 알다시피 더욱 심화되었다. 물론 고도로 발달한 현대 기술문명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중세의 왕보다 낫게 만들어주었고, 개인에게는 정부와 집단의 간섭과 압력으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무척이나 많이 가져다주다. 사실 그런 간섭과 압력도 야만의 소산이 아니라 문명의 소산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와 동시에 고도로 발달한 정보통신기술과 인프라 및 사회복지제도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하며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서로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해서 해결해야 했던 협동과제들이 이제는 혼자서 클릭 몇 번이면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생활이 서툴고 부담스러워 실내로 숨어버린 히키코모리들이 유독 많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술과 제도가 매개하게 되면서 많은 현대인들은 소외와 우울, 급기야는 높은 자살률로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결핍의 징후다. 저자가 짚어낸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현대 문명사회는 줄 수 없지만, 인디언 공동체는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긴밀한 유대감이었다. 저자는 현대에 나타난 부족사회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닥치면 사람들은 통념과 달리 패닉과 무정부상태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뭉치고 협력하며 공공의 문제에 대응하게 된다. 비록 현대사회는 계급과 소득수준과 인종과 종교와 성별로 사람들을 갈라놓았지만, 전쟁과도 같은 거대한 재앙은 그런 사사로운 경계를 간단하게 무시하도록 만들어버린다.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주의를 한 곳으로 모으게 되고, 이러한 집단적 몰입은 마치 자신이 보다 거대한 존재의 일원이 된 것과도 같은 깊은 참여감과 유대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실제로 1차세계대전 독일의 런던 대공습 당시 런던은 자살과 정신장애가 급감했고, 심지어 그 난리통에 범죄률도 감소했다고 한다. 전쟁은 사회의 벽을 허물었고, 정신병 환자와 같이 역할과 의미가 없던 이들에게도 사회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어쩌면 자신의 역할과 삶의 의미를 찾아내기 힘든 무기력한 도시생활이야말로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저자는 전쟁을 옹호하지 않는다. 단지 전쟁이 아니고서야 실존적 운명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사회를 애석하게 여길 뿐이다. 저자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부족(tribe)정신을 되살릴 수 있을지로 이어진다. 저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흔해 빠진 대립 구도는 아마도 영영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고대 수렵채집 인류가 형성해온 두 가지 주요 부족정신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배려하고 약자를 도와야 했던 동시에,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배신자와 무임승차자를 식별하고 처벌해야 했다. 가난하고 아파하는 이웃을 그냥 지나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리고 중산층의 세금만 축내는 상하류층의 모습은 얼마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인가.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성의 절반을 억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신 저자는 공공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키려고 하는 기풍을 만들어감으로써 부족정신을 되살리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본래 다르지 않다는 인식, 즉 만인이 공유하고 있는 인간성을 실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본래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함께 살아왔고 또 함께여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와 동시에 공동체는 구성원들을 단순히 수동적인 수혜자나 공급자로 전락시키기보다는 그 모두에게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의 기여를 공히 인정해주는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유능감과 진정성, 그리고 유대감을 모두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천적과 사냥감과 재해에 공동으로 맞서왔다는군.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 협력과 연대이다보니, 아무래도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이 인류의 뿌리 깊은 본성으로 남았나봐. 그러는 와중에 공동체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려는 구성원이 생겼다고 하는군. 그런 녀석들은 집단을 위태롭게 했을 테지. 바로 그런 식충이를 식별하고 처벌하는 습성이 공정심이라는 본성으로 남았다더군. 흥미롭지 않니? 보수주의 마음과 진보주의 마음의 근원이 이렇게 맞닿아 있다니. 아마 두 가치관의 충돌은 인류가 존속하는 동안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인류는 애착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을 테지. 동시에 무임승차 역시 굉장히 달콤한 유혹이기 때문에 그 틈새를 공략하려는 시도는 늘 공동체 안에 도사리고 있을 거야. 아무도 보는 사람 없고 증거도 남지 않는다면, 눈앞의 부당한 이득을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눈먼 돈이 그렇게 쉽게 사람들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겠지. 멀쩡한 돈을 일부러 눈먼 돈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겠고. 아마도 가장 먼저 솎아져야 할 무임승차자들은 멍청하고 가난한 사람보단 똑똑하고 부유한 사람 중에 더 많을 거야. 아무튼,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우리가 다시 연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건데, 그 방법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성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는 거야. 말은 좋지. 눈물 날 것 같아. 하지만 막연하기 짝이 없어. 지금은 기술과 제도 덕분에 너무도 안락하고 안전한 일상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어. 사람들에겐 타인이 필요하지 않아. 여러 경우에 말이지. 솔직히 나도 이런 세상이 너무 편해. 하지만 고작 벽 하나 때문에 아파트 이웃이 데면데면하다니, 고대인의 심성으론 도무지 이해 못 할 현상인 거야. 달리 말해 그 정도로 가까이 붙어살면서도 서로가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경이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겠지. 이 상황에서 재앙이나 전쟁도 없이 무슨 수로 우리 모두가 인간성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는 걸까 고대 수렵채집인의 공동체는 기껏해야 50명, 아무리 많아도 150명을 넘지 않았대. 그 정도 규모라면 충분히 이해해. 서로의 이름, 얼굴, 성격, 취미, 가족관계, 심지어 러브시그널 작대기도 다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을 테니까. 무임승차자도 금방 탄로 날 테니 상호견제도 아주 확실했겠지. 하지만 아뜩하리만치 새까만 인간 무더기로 구성된 현대 도시사회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인간성이라는 의미를 실감 한다는 게 도대체 가능할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신없는 대도시에서, 하다못해 초고층 빌딩에 여객기가 처박히는 사건이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생생한 연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 길가에 지나치는 사람들 얼굴이나 다 기억할 수 있을까? 우리는 나의 들숨이 너의 날숨이었다는 사실을 잊었지. 이건 감상주의적인 헛소리가 아니야. 가감 없는 현실이지. 하지만 머리로만 알 뿐 가슴으로 느낄 수는 없어. 시인이 아니고서야. 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은 이래. ‘이제 부족으로 돌아가자.’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나는 비관적이야. 우리는 부족으로 돌아갈 수 없어.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어.
아마존 30주 연속 베스트셀러, 분야 1위! 뉴욕타임즈 25주 연속 베스트셀러! TED 조회수 190만 돌파! ‘상실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어디로 가는가? 각자도생으로 내몰린 우리와 현대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충격, 트라이브! 인류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 자살률과 우울증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왜 생면부지의 타인을 구하려고 목숨까지 내던질까? 기록적인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미국 뉴올리언스의 범죄율은 왜 하락했을까? 「뉴욕타임즈」의 저널리스트이자, EBS 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을 받은 「레스트레포」의 제작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시배스천 영거는 끊임없이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작가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빠르고 긴장된 현대의 사회구조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다른 사람을 위한 이타적 행동의 기회를 박탈하는 모순적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속한 부족을 위해 헌신하는 인간 특유의 연대와 결속은 인류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 한 결속 없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잃어버린 ‘부족의 정신’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추천사_손석춘
저자의 말
프롤로그
하나. 부족의 가치
둘. 잃어버린 본능
셋. 노스탤지어
넷. 이제, 부족으로 돌아가자
다섯. 후기
감사의 말씀
참고문헌
옮긴이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