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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모노레터 화첩기행 네 번째


회화를 전공하였지만 젊은 시절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유가 예술 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대학장과 미술관장을 거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있는 작가 김병종의 (화가인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하는) 에세이집이다. ‘신화첩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신문에 연재하였던 글 가운데 뽑은 것으로, 누군가에게 쓰는 편지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가답게 책은 적, 녹, 백, 흑 이라는 네 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으며 각각의 챕터에는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무용가 등이 차곡차곡 담겨져 있다. 이와 함께 몇몇 전시장과 거리 및 장소가 더불어 그려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과 독일과 중국을 넘나드는 이들의 삶을 가까운 거리에서 혹은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이 (함께 실려 있는 그림들마저도...) 무척 따사롭다. 그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미칠 것 같은 갈망과 안타까운 손짓으로만 겨우 닿을 수 있는 땅에 사는 예인들 - 미치다 赤적’ <혼불>의 작가 최명희, 마이미스트 유진규, <홍길동>의 저자인 조선시대의 문인 허균, 광부들을 그린 민중미술화가 황재형, 작곡가이자 연출가인 김민기, 잊혀진 혁명가 김산, 거창에서 활동하는 연극인 이종일, 플라멩코 무용인 조광 ‘자연에서 숨을 길러 하루를 여는 이들의 자화상 - 음지 綠녹’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산으로 들어간 시인 박남준, 중증 지체 장애 시인 권오철, 베를린의 작곡가 진은숙, 함부르크의 화가 노은님, 중국의 화가 치바이스, 피카소 거리의 젊은 예술인들, 통영이 낳은 작곡가 윤이상 ‘멀리로 꿈을 좇아 훨훨 따난 이들이 남겨 놓은 희고 가벼운 한 무더기의 웃음 - 바람 白백’ 일본의 한국 미술품 수집가 정조문, 정조문의 장녀로 이청의 우영자인 정영희, 유럽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헬렌 권, 백자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도예가 권대섭, 6000여 점의 전통 석물이 전시되어 있는 세중옛돌박물관, 영인문학관을 운영하는 이어령과 강인숙 부부, 한국의 바리비종을 꿈꾸는 미사리와 양평 ‘박명 속에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낡고 쓸쓸하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회상 - 닫다 黑흑’ <사평역에서>의 시인 곽재구, 남도의 화가이자 흑백다방을 운영한 유택렬, 유택렬의 딸이며 흑백다방을 이어가는 피아니스트 유경아, <중국인 거리>를 쓴 소설가 오정희, 전설적인 우리 근대의 무용가 최승희, 예술인들의 추억이 깃든 방배동의 카페 장미의 숲, 한국인 노수강이 운영한 베를린의 로호 갤러리, 무교동의 추어탕집 용금옥의 문인과 화가와 기자들을 시로 쓴 시인 이용상 이렇게 소개된 이들 중 일부는 작가 자신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기도 하니, 이들을 떠나보내는 작가의 심경이 꽤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기도 하였던, 그러나 그림을 그리느라 놓고 있었던 문필가의 펜은 그러한 때에 제대로 힘을 발휘한다. 함께 실린, 화가가 직접 그린 작은 그림들이 아니라면 그저 문인이 쓴 수필집이라고 봐도 무방한 유려한 필력이다. “최명희는 부친의 생가가 있던 이곳을 무대로, 벽화를 그린 장인처럼 손가락으로 바위를 파듯 소설을 써놓고 기진하여 떠나버렸습니다. 서풍西風이 광풍狂風 되어 몰아치고 소중한 것들이 덧없이 내몰리는 이 즉물적卽物的인 시대에도, 어딘가에서는 우리네 소중한 한국혼의 불이 타오르고, 또 타올라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가버렸습니다...” 이러한 필력은 아마도 펜 대신 붓을 들고 있던 시간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던, 세상과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작가가 자신의 글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나 장소들 또한 꽤 따뜻하다. 그래서 작가는 간혹 그들을 만나러 가거나 그 장소를 되짚어 가기를 즐기는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여행을 통해 다시 한 번 필력에 힘을 받는 선순환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몰에 섞여 산그늘은 수묵처럼 번져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고요입니다. 멀리 논둑길을 아이들 몇이 석양 속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아마도 예전 같았다면 작가의 인적 네트워크를 부러워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섬진강의 시인을 찾았다가 누린 저 일순간의 고요가 부러운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작가의 아래와 같은 말에 충분히 수긍하게 된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작가가 다루고 있는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아니라, 바로 ‘적막’과 ‘고요’ 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의 편지글 속에서 ‘적막’과 ‘고요’의 일단이 읽힌다. “눈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빠른 세상입니다. 너나없이 바람의 구두를 신고 헤쳐온 세월들입니다. 넘쳐나는 소음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적막이나 고요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게 언제이던가요.”
동양화가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가 쓴 김병종의 모노레터 는 한평생 열정을 불태우며 살아간 예인藝人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서른한 통의 편지다. 이미 김병종의 화첩기행 1·2·3 을 통해 예술가의 발자취를 꾸준히 더듬어온 그는, 이번에는 만년필로 눌러쓴 편지에 우표를 붙여 보내는 고전적인 형식(실제로 그는 육필을 고집하고 있다)을 선택해 존재의 내밀한 고독을 담아낸다.

미치다 赤적
육신을 허물고 혼불로 타오른 푸른 넋 - 최명희
침묵의 말, 세상을 토하다 - 유진규
태양을 사랑한 시대의 이단아 - 허균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 황재형
다시 노래는 꽃으로, 길은 저 봉우리로 - 김민기
잊혀진 순결과 열정의 혁명가 - 김산
자연과 인간, 연극이 하나되다 - 이종일
식지 않는 플라멩코의 핏빛 자유 - 조광

음지 綠녹
시인의 가슴에서 흐르는 강물의 언어 - 김용택
산그늘에서 만난 음지식물의 자화상 - 박남준
강릉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 - 권오철
베를린에서 만난 물푸레나무 - 진은숙
생을 구원하는 이 고운 묵선 - 노은님
옛 수묵화 속으로 걷다 - 치바이스
젊음이 출렁, 실험이 꿈틀하는 예술의 전방 - 젋은 피카소들
통영으로 향하는 꿈속의 나비 - 윤이상

바람 白백
열도에 흘러든 조선의 미 - 정조문
낡고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 정영희
한국혼을 노래하는 밤의 여왕 - 헬렌 권
백색에 빠진 도공의 혼 - 권대섭
오랜 세월을 견뎌낸 석인의 미소 - 세중옛돌박물관
문학의 숲에서 온 편지 - 이어령.강인숙
한국의 바르비종에서 만난 옛 사랑 - 미사리와 양평

닫다 黑흑
간이역에서 나를 보다 - 곽재구
진해에서 피고 진 남도의 화인 - 유택렬
흑백다방을 감싸는 꽃잎의 추모곡 - 유경아
내 사랑의 열병은 깊은 자국을 남기고 - 오정희
전설이 되어버린 춤의 여인 - 최승희
오래된 추억으로부터의 초대 - 장미의 숲
베를린의 비밀 다락방 - 로호 갤러리
모든 곳에는 사람이 깃든다 - 이용상